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티에르 (문단 편집) === 이후 === 코뮌을 진압한 이후 프랑스에는 공식적으로 [[프랑스 제3공화국|공화정]]이 수립됐고, 티에르는 새 공화정의 첫번째 대통령이 된다. 취임 직후 티에르에게는 [[보불전쟁]]의 상흔을 지우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고, 티에르의 노련한 국정 운영 덕분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[[독일 제국]]에 조기 지불하면서 프랑스에 막대한 채무를 지워 이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려던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. 하지만 보불전쟁에서 무력하게 당한 군대를 재편하기 위해 복무기간 5년인 [[징병제]]를 도입하자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. 여기에 당시 의회 다수를 차지한 [[왕당파]]들과 공화국 선포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[* 웃긴건 티에르는 본인도 왕당파였음에도 국왕 선출을 거부하고 공화국을 멋대로 선포했다.. ], 공화파들과도 파리 코뮌 강제 진압으로 생긴 앙금으로 적극적인 협력은 하지 못했다.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티에르는 의회를 압박하기 위해 1873년 대통령 사직서를 제출하는 강수를 두었다.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'''의회가 이 사직서를 그대로 수령하면서''' 티에르는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.(...) 그리고 왕당파는 이를 기회로 삼아 티에르 대신 [[법통주의|강성 왕당파]] [[파트리스 드마크마옹]]을 대통령에 앉혀 [[왕정복고]]를 시도하지만 내분으로 인해 실패한다. 이후 티에르는 공화주의 보수파의 막후 보스로 활동하다가 1877년 사망한다. 사후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